발의 전염

나는 20107월에 중국에 갔을때 불행했다. 도착한후에 2주일후에 모기가 내 발등을 물었다. 아침에 거기에 작은 빨간 점이 나왔다. 3번째날에 큰 빨간 점이 있어서 우한 대학교에 병원에 가고 항생 물질 환약을 받았다. 6번째날에 발등이 모두 빨개져서 병원에 날마다 항생 물질 주입을 받아야됬다. 걸어서 가는것이 어려워져서 택시를 타야됐다. 링거를 맞는 방은 더럽고 천장에서 물이 똑똑떨어져서 피에 더러운것이 전염될수있는것에대하여 걱정했다. 8번째일에 발뒤꿈치도 빨개지고 아팠다. 12번째날에 오른쪽발 모두 파래져서 걸을수없었다.

그래서 13번째날에 20일동안 입원했다. 병원에 오자마자 일반실에 갔다. 15분후에 VIP병동의 간호사가 오고 내가 외국인이라서 일반실에 누워있을수없어서 VIP병동에 가라고했다. 내 질병 보험으로 VIP방이 안되어서 내가 거기에 가고싶지않다고했다. 하지만 간호사는 나를 바퀴 달린 의자로 앉히고 VIP병동에 데려 갔다. 거기에 마오 쩌둥의 포스터가 있는 1인실이 있다. 내가 바퀴 달린 의자에서 내리고싶지않아서 1시간동안 거기에 앉아있었다. 1시간후에 간호사가 나서 VIP방에서 누워있고싶지않으면 내가 보험 회사에 직접 연락해야된다고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는 일반실에서는 나와 영어로 이야기하지않을거라고했다. 내가 동의해서 일반실에 돌아갔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내야되었다. 내가 장학금을 4주일후에 받을것이기때문에 돈이 별로 없어서 이틀치입원비만 냈다. 그래서 보험 회사에 빨리 연락해야되었다. 내중국휴대폰은 국제전화를 할수없었다. 병원에 인터넷이 없었다. 의사 사무실에서 인터넷은 할수있다고 들어서 거기에 가거 의사의 컴퓨터에 스카이프를 설치 했다. 유럽 연합의 장학금이 있어서 벨기에의 보험 회사의 보험이 있었다. 그회사에 전화할때 직원은 영어로 말할줄몰랐다. 영어로 말할줄아는 직원을 구하는데 10분이 필요했다. 내일 아침에 보험 회사는 병원에 전화하고 돈을 낼거라고 했다. 그럼 3번째날에 다시 전화해서 병원이 나에게 돈을 더 안준다고했다. 의사가 와서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내일 병원을 떠나야한다고했다. 내가 아버지와 친구에게 보험 회사에 전화하라고하고 나도 거기에 전화했다. 그날동안 간호사와 의사에게서 도움을 받지않았다. 내일 의사가 보험 회사가 다시 전화해서 문제가 없다고했다.

중국은 병원에서 입원하는 사람에게 가족이 음식을 줘야하는편이다. 병원에서 날마다 병원식당에서 받은 음식이 없다. 나는 중국에 7월에 도착해서 캠퍼스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친구를 사귈수없었다. 다른 체코학생과 내교수님의 학생들 가끔 병원에 오고 나에게 음식을 사줬다. 그럼 자주 KFCMcDonalds에서 음식을 주문해야되었다. 간호사는 보통 나도 얼엽끼 먹는 매운 음식을 사서, 나도 KFC음식이더 편했다.

우한대학교의 병원이 좋은 병원이라서 간호사는 예쁘다. 하지만 능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간호사가 나에게 젖은 붕대를 만들때 처음에 발에 마른 봉대를 둘둘감았다. 나중에 소포의 접착 테이프를 둘둘감았다. 마지막에 침대에 있는 발에 물을 부어내서 침대가 젖었다. 우한대하교에서 간호사의 학사를 받았다날마다 2번씩 항생 물질 주입을 받았다. 그럼 7시에 받고 13시에 다시 받았다. 이상해보여서 3째날에 의사에게 왜 12시간후에 받지않는냐고 물었다. 의사가 12시간후에 다시 항생 물질 받아야된다고 하셨다. 12시에 교대를 하는 간호사가 모두 일을 발리 하고싶어해서 19시에 줘야되는 주입을 19시대신에 13시에 줬다. 나에게 19시에 주고싶어하지않아서 내가 날마다 그 13시에 오는 간호사와 싸워야되었다. 내가 내내 항생 물질을 받아서 설사했다. 그래서 날마다 간호사와 의사에게 푸로 바이오 틱스를 주라고했지만 7일이나 기다려야되었다. 오른쪽 발을 사용할수없어서 매일 목발를 달라고했지만 6일 기다렸다. 그동안 목발대신에 의자를 사용했다. 뱀처럼 의자를 움직한후에 의자에 손을 기댈때 뛰었다. 목발를 받았을때 작은데다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을 듣지못했다. 목발를 사용한적이 없어서 넘어졌다. 병원의 서비스가 이상했다

의사께서 주마다 항생 물질을 바꾸었다. 마침내 좋은 항생 물질을 뽑아서 내 발이 좋아졌다. 3주일후에 기숙사에 돌아왔다. 발이 좋아진후에 병원에 중국친구를 데리고 돌아갔다. 친구는 의사에게 내가 무슨 질병이 있었는냐고 물었다. 의사께서 무슨 질병인지모른다고 대답하셨다

우한에서 목발을 사용하면 생활이 힘들다. 중국에서는 여행하는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관습이 없다. 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내 앞에 멈춰서 목발을 짚고타려는데 근처에 서 있던 사람이 그 택시를 타고갔다. 교정에 승강기가 없어서 육층에 수업이 있을때 거기에 난간을 잡으면서 뛰어넘어야되었다. 교정에 좌변기가 있다. 외국인기숙사밖에 양변기가없어서 내가 설수없어서 힘들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발이 나아서 4개월후에 다시 여행할수있게되었다

독일사람이 사망한것에 대한 시위

2002년에 제 2 차 세계 대전후에 브르노에서 독일사람 사망한것에대한 책을 읽었다. 194559일 체코에서 대전이 끝난후에 브르노에서 새로운 정부는 독일 사람을 수용소에 모았다. 체코말을 말할줄아는 실력대로 사람이 뽑혔다. 체코말으로 말할줄모른 사람은 독일 사람이었다. 독일말으로 말하는 유대인도 독일사람이었다. 530일에 2만사람이 오스트리아에 걸어서 가야되었다. 음식을 받지않고 오염된 물을 받아서 이틀 행진동안 1-2천사람이 사망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Brno_death_march). 사망한 사람이 보통 아기나 노인이다. 브르노정부는 이것에대해서 2002년까지 사과하지않았다. 이것에대한 책을 읽은후에 신문에서 정부는 사과를 다시 거절한다고 읽었다. 화가 나서 사과를 요청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로했다.

나는 날자를 고른후에 포스터300개를 만들었다. 그포스터를 시내 중앙의 길에 붙였다. 포스터를 붙이자마자 연세가 많은 남자들이 와서 포스터를 없했다. 2002년에 많이 체코사람은 1945년에 독일사람이 모두 나치 라고 생각했다. 경찰도 그렇게 생각했다. 경찰은 내가 독일사람을 지원하는 시위를 조직해서 나치를 지원하는 시위를 조직한다고 생각했다. 체코에서 나치를 지원하기는 범죄라서 경찰장교는 나에게 전화하고 왜 시위를 조직하느냐고 물었다. 친구에게도 전화하고 내가 신나치이냐고물었다. 친구는 내가 신나치 아니라고 대답해서 나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시위가 있는 광장에 올때 거기에 시위에 가세하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 4명이 왔지만 두들겨 맞고싶지않다고해서 무엇을 생길것을 보도록 100 미터밖에 섰다. 시위에서 항의하는 사람이 15명이 왔다. 나에게 내가 나치라고했다. 그사람은 부모님께서 나때문에 창피스러워해야된다고했다. 보통 연세가 많은 사람이다. 노인은 대전에 싸우지만 나처럼사람때문에 싸우지않았다고 광장에 경찰이 없으면 나를 쏠거라고했다. 기자도 오고 보통 시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비우호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다른 그렇게 많이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던적이 없다.

다음날 신문에서 조직하는 사람밖에 독일사람으로 사과를 가세하는 사람이 오지않다고 읽었다. 표준 신문이 문장 2개만 있었다. 공산당의 신문에 한 페이지가 있었다. 대전동안 돌아가셨던 체코 사람이 내 시위를 보지않아서 부그럽다고했다. 거기에 공산당의 선도자는 체코는 독일에게 결코 사과하지않을거라고했다. 나는 그동안에 부모님의 댁에서 살았다. 3일후에 아침에 초인종이 나를 깨웠다. 문에 80살의 남자가 있었다. 전화 번호부에서 거기에서 루보밀 린코프가 산다는것을 찾았다고하셨다. 내가 와츨라프 린코프를 아는냐고 물으셨다. 내가 그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노인께서 1945년에 20살이고 그동안에 독일친구가 많아서 아주 부끄럽게 느겼다고 하셨다. 나에게 시위를 조직한것에 감사하고싶어 하셨다. 내가 다시 잠들었는데, 다시 일어난후에 꿈인지 아닌지몰랐다.

2002년후에 사람이 의견은 바뀌었다. 2015년 브르노 시장은 독일사람에게 사과했다. 매년 5월에 1945년에 행진한 길에서 똑같이 행진할수있다 (http://meetingbrno.cz/en/programme/march-reconciliation-2017).

내 생활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브르노에서 계속 살고있다.

7살이었을때 4개월동안 알제리에서 살았다.

그동안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였어서 사회주의 알제리를 도왔기때문에 아버지께서 알제리에서 2년동안 일하셨다.

초등학교졸업후에 수학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과학도 배우고싶어서 4학년때 다른 대학에도 입학했다. 그렇게 해서 2년동안 수학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심리학과 정치학학사과정을 공부했다. 수학석사학위를 받은후에 다른2년동안 대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심리학과 정치학학사를 공부했다. 심리학과 정치학학사학위를 받은후에 심리학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심리학대학원을 졸업 한후에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정보 시스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기 시작해서 3년동안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사회 심리학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심리학박사를 공부하면 영어외에 다른외국어 시험이 필요했다. 대학교에서 무료 일본말수업을 다닐수있어서 그 수업을 다녀서 일본어시험을 봤다.

프로그래머로 일했을때 연구할 시간이 적어서 다른 외국에서 공부할수있도록장학금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내가 마사릭대학교의 파트너 대학교에서 공부할수 있도록 장학금을 신청했다. 박사학생 브라질이나 캐나다나 한국을 고를수있다. 한국말과 일본말 비슷해서 한국어을 골라서 성균관대학교에서 1년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받았다.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간후에 심리학대학원에 영어로가르치는 수업이 별로 없어서 마지막에 매일 한국어 수업을 다니기로했다. 성균어학원에서 1년동안 한국어수업을 다녔을때 친구의 90% 중국이나 대만사람이였다. 한자를 공부하면 한국단어를 기억하는것이 쉬워질수있다고 들어서 중국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만에 6개월동안 중국어를 배우려고갔다. 정치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후에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교에 3개월동안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그동안에 중국에서 1년동안연구할수있도록 장학금을 받아서 중국우한에 있는 중앙중국사범대학에 갔다. 거기에서 반년동안 중국수업을 다닌후에 박사논문 연구를 했다.

중국에서 브르노에 돌아오자마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렇게 2년반동안 동아시아에서 공부해서 정치대학교에서 아태지역연구박사를 공부하기로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두번째박사과정을 공부하는것이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2년후에 아태지역연구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체코에 돌아왔다.

브르노에서 3년동안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2주일전에 직업을 바꿨였다. 요즘 체코 교통연구 센터 연구자로 일한. 내계획은 거기에서 교통심리학연구를 하면서 연구에 필요한 프로그램을하는것 이다.